입력 : 2010.01.08 15:35

 


6·25전쟁 때, 상원사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1950년 6·25전쟁은 민족의 비극이었다. 그 전쟁으로 민족의 분단은 더욱 더 고착화되었고, 남북 간의 이념 대결이 극심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전국의 문화재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소실되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북진을 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눈물을 머금고 후퇴를 하였다. 마침내 국군은 38선상에서도 중공군의 총공세에 밀려 다시 남쪽으로 후퇴를 하였고, 주민들도 다시 피란을 가야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1·4후퇴이다.


“이제 불을 지르시오.”


“스님,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나야 죽으면 어차피 다비茶毘에 붙여질 몸이니 내 걱정은 말고 어서 불을 지르시오.”


“스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나오세요!”


“너희들은 군인으로서 상부의 명령에 의해 불을 놓는 것이니 불을 놓으면 되고, 나는 중으로서 부처님 제자로서 마땅히 절을 지켜야 돼. 너희는 상부의 명령을 따르면 되고, 나는 중으로서 부처님 명령을 따라 절을 지키면 되지 않느냐? 본래 중들은 죽으면 당연히 불에 태우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나이도 많고 죽을 날도 멀지 않았으니 잘된 것 아니냐. 그러니 걱정 말고 불을 질러라.”


절의 소각을 전해들은 한암스님은 장교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서는 방에 들어가서 가사 장삼을 입고, 법당의 중앙에 가부좌를 하였다. 그리고는 장교에게 이제 되었으니 불을 놓으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노승과 장교는 상원사 소각을 놓고 눈에 핏발이 선 대결을 하였다. 장교의 옆에 있는 사병이 “이제 끄집어낼까요?”라고 말을 하였다. 당시 이 장면을 지켜본 한암스님의 상좌와 보살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면서 장교에게 제발 살려달라고 울면서 부탁하였다. 잠시 후, 무엇인가를 골몰히 생각한 장교는 “이 스님은 보통 스님이 아니다. 도인 스님이 분명해.”라고 말을 하면서 부하 사병들에게 상원사 법당 밖으로 나갈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고는 장교는 절을 태웠다는 증명을 하기 위해, 절의 문짝을 태워 연기라도 내야 하겠다는 양해를 노승에게 얻었다. 장교는 부하 사병들에게 상원사의 문짝 수 십여 개를 떼어내서 마당에 놓고 불을 지르도록 하였다. 문짝을 태운 검은 연기는 상원사 하늘로 높이 올라갔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상원사에 불이 난 것처럼 보였다. 문짝을 다 태운 장교는 불을 놓았다는 증거로 노승이 옻칠한 깨진 죽비 하나를 가지고 상원사를 내려갔다. 한암스님의 생사불이적인 생사관에서 기인한 절의 수호 정신으로 상원사는 기적적으로 소각을 면한 것이다. 당시 한암스님의 말을 듣고 소각 중지 명령을 내린 그 중위의 신상은 전하지 않고 있다.



상원사와 문화재를 지킨, 한암스님은 누구인가


 

 


한암스님의 죽음으로 맞선 기세와 지혜로운 국군 장교의 결단으로 상원사는 건재하였다. 그로 인하여 상원사의 문화재, 즉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 문수동자상(국보 221호), 상원사 중창권선문(국보 제292호)은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이 문화재들은 조선시대 세조가 상원사에 행차하여 문수동자를 만났다는 기연으로 인하여 조성되거나 이운된 것이었다.


상원사 문화재를 수호한 한암스님은 조계종의 종정을 네 번이나 역임한 근대 고승, 큰스님이다. 한암스님은 1876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 그의 나이 22세 때인 1897년 금강산 장안사에서 출가하였다. 그는 치열한 수행을 하여 금강산 신계사와 해인사에서 두 차례의 깨달음을 겪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 근세 선불교의 고승인 경허에게 인가를 받았고, 통도사 내원 선원에서 30세의 나이로 조실을 역임하였다. 1923년에는 서울의 봉은사 조실로 추대되었으나, 일제에 의해 국권을 상실당하고, 불교마저도 친일불교로 전락되어, 파계승이 들 끓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천고에 자취를 감출지언정 춘삼월에 말 잘하는 앵무새는 되지 않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오대산 상원사로 들어갔다.


 

 


그는 이렇듯이 산중에 칩거, 수행하면서도 불교 경전 공부와 참선 수행을 치열하게 하였다. 이 같은 한암스님의 명성은 전국에 퍼졌다. 그래서 당시 전국의 선방 수좌들은 상원사 선방의 한암스님 회상에서 한철 수행을 하려고 몰려들었다. 한암스님은 월정사 승려와 그를 찾는 승려들에게 반드시 지켜야 할 승가5칙 즉 참선, 간경, 염불, 의식, 가람수호를 가르쳤다. 이 5칙을 다 지키면 좋겠지만 그 중의 한 가지는 꼭 지키라고 강조하였다. 이 전통은 지금도 월정사 스님과 한암문도회 스님들에게는 전설로, 가풍으로 전해진다.


1950년 6·25전쟁이 나자, 그는 그의 제자들을 안전한 남쪽으로 보내고 그의 상좌인 희찬스님, 그를 시봉하던 평등성보살과 상원사를 지키고 있었다. 상원사 소각을 저지한 한암스님은 3개월 후인 음력으로 2월 24일, 상원사에서 좌탈입망座脫立亡으로 열반하였다. 그런데 마침 한암스님의 열반 직후 그곳을 들른 국군8사단 정훈장교인 김현기대위가 그 열반 직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그의 마지막 모습은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김현기대위의 육사동기이며 인접 사단에서 정훈장교로 근무하던 소설가, 선우휘는 한암스님의 상원사 이야기를 전해 듣고, 1969년 1월의 《월간 중앙》에 <상원사>라는 단편소설로 기고했다. 그 후 한암스님의 문화재 수호 이야기는 세상에 전해졌다. 상원사 문화재에는 이렇듯이 애틋한 이야기들이 배어 있다. 월정사와 상원사를 찾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알고나 있는지 궁금하다. 지금 상원사에는 낙엽이 뒹굴고 바람이 세차게 불겠지만 한암스님의 단호함 그 가르침은 여전할 것이다.


글·김광식 동국대학교 연구교수   
사진·월정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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