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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철원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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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08.30 09:13 / 수정 : 2007.08.30 09:13

“일목대왕의 호령소리 들어보았는가”
통일조국 대동방국의 수도를 꿈꾸는 땅

그렇다면 궁예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국호로 풀어보자. 904년의 국호 마진(摩震)은 ‘마하진단(摩訶震檀)’의 줄임말이다. ‘마하’는 범어로 ‘크다’는 뜻이고 ‘진단’은 동방을 뜻한다. 이는 곧 한반도뿐만이 아니라 만주와 연해주까지 아우르는 대동방국을 말한다.


911년의 국호는 태봉(泰封). 주역에서 ‘태(泰)’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이 같아진다’는 뜻이라 하고, 봉(封)은 봉토, 곧 땅이다. 결국 궁예는 철원을 기반으로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 세계’, 곧 미륵세상인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이다.


철원읍 홍원리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태봉국 도성은 궁예가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성을 옮기기 위해 903-904년경 세운 성곽이다. 외성과 내성으로 이중 축조된 이 도성은 왕궁성 둘레 1.8km, 내성 7.7km, 외성 12.5km에 이르는 성이다. 이는 이전 백제의 풍납토성(3.5km), 신라 월성(1.8km), 고구려 국내성(2.7km)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400~500년 뒤에 쌓은 서울 성곽(18km)에도 버금가는 규모임을 알 수 있다.


궁예는 이후에도 수년간은 후백제의 견훤과 싸워 이기면서 서해안까지 장악해나갔다. 그러나 911년 견훤의 사위인 지훤에게 무진주에서 패하면서 암운이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913년 아지태 사건은 궁예 몰락의 신호탄이었다. 관심법(觀心法)을 내세워 신하들을 죽이기 일쑤였고, 915년엔 궁예, 부인 강씨와 왕자 2명까지 죽였다. 게다가 무리한 천도로 백성의 부역과 세금이 부담되어 지지를 상실하였고, 때마침 흉년이 들자 민심이 돌아섰다.
 
미륵이라던 개혁 군주가 어느덧 폭군으로 전락한 것이다. 기득권 세력이었던 송악의 보수 호족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결국 918년 부하인 신숭겸·홍유·복지겸·배현경 등이 왕건을 추대하자 궁예는 도망가다 평강(平康)에서 백성들에게 피살되었다. 그리고 왕건은 이듬해 1월 철원을 떠나 송악으로 천도한다.


정사에서 궁예에 대한 평가는 아주 냉혹하다. 삼국사기, 고려사 등에는 태봉국을 세운 건국주로서의 궁예는 온데 간데 없고, 백성들을 못살게 군 도적으로만 평가절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누가 뭐래도 고려의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한 과장이요, 포장임을 알 수 있다. 궁예는 원대한 포부를 지닌 개혁가였으나 자기 관리 실패로 기득권 세력인 송악의 호족과 세 대결에서 끝내 패하고만 것이다.


정사는 궁예를 혹평하지만 야사는 비교적 부드럽다. 상주·문경에서 견훤 흉을 보면 낭패를 당하듯이 철원서 궁예를 힐난하면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호칭도 ‘궁예왕’으로 높이는 게 자연스럽다. 철원을 비롯한 포천 등 이 지역에서 채록된 설화를 보면 왕건은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이고, 궁예는 용의주도한 의도로 접근한 왕건의 쿠데타로 희생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정사엔 궁예가 성을 도망쳐 보리를 훔쳐 먹다 백성들에게 붙잡혀 맞아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야사는 다르다. 철원·포천 지역의 구비설화나 지명 전설을 보면 궁예는 추종 세력과 함께 철원 명성산성, 포천 보개산성·운악산성 등에서 치열한 항전을 벌인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향토사학자들은 궁예가 쫓겨난 뒤 바로 죽은 게 아니라 왕건과 10~15년을 더 항전했다고 보고 있다.

1946년 초 북한정권 아래에서 지은 철원 조선노동당 당사. 6·25전쟁 때 생긴 포탄, 총탄 자국이 촘촘하다.
철원을 기반으로 대동방국을 꿈꾸던 궁예가 왕건에게 쫓겨나 삼방협(평강에서 안변 사이의 협곡)에 잠든 지 어언 1,100여 년. 그가 혼신의 힘으로 세웠던 태봉국 도성은 이 땅에서 일어났던 6·25전쟁과 분단이 빚어낸 비극의 상징이 되었다. 전쟁 중에는 이곳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포탄을 퍼부으며 파괴를 거듭했고, 휴전선은 도성을 남북으로 반반씩 가르고 있다. 또 3번 국도와 경원선은 도성을 동서로 갈라놓았다. 거기에 휴전선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2km씩 물러나 있는 비무장지대 잡초밭에 묻혀 있는 것도 서러운데, 도대체 몇 개인지도 모를 지뢰가 전체를 뒤덮고 있으니 세상에 이토록 팔자 센 도성이 있을까. 그래서 전문가들은 물론 많은 이들이 태봉국 도성에 대한 남북공동조사는 분단 극복과 민족 통일의 상징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곳을 통일 조국의 수도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고.

1.고석정 입구의 임꺽정 조형물. 의적 임꺽정이 고석정을 근거로 활동하였다는 전설에 바탕을 두고 제작한 것이다. 2.안보견학을 하려면 차량 앞 유리창에 붙여야 하는 출입증. 3.통일을 꿈꾸는 땅 철원은 아직도 지뢰와 전쟁 중이다.
아쉬운 마음으로 전망대를 내려와 월정역에서 철마를 본다. 얼마 전엔 분단 반세기만에 경의선과 동해선을 시험 운행하는 역사적인 사건도 있었다. 한국 국민들에게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문장은 분단의 아픔과 상처, 평화 통일의 염원을 모두 담고 있는 애틋한 표현이다. 역사적인 남북 열차 시험운행을 계기로 철마는 이제 평화와 통일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어찌 경의선뿐이겠는가.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 월정역 한쪽에 녹슨 채 멈춰 있는 이 철마도 달리고 싶다. 통일이란 종착역을 향하여.

남방한계선에 가장 근접한 지점에 있는 월정리역은 경원선의 간이역이었다.
선도 차량은 월정역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경원선의 중심역이며 금강산전철의 시발점이던 철원 역사가 먼발치로 보인다. 이 외에도 얼음창고, 농산물검사소 등 당시의 건물들 잔해가 눈길을 끈다. 내려서 둘러보고 싶었으나 선도 차량을 놓쳤다가는 무슨 경을 칠지 알 수 없는 일. 잠시 서행하면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기왕에 견학하려면 이런 문화유산도 함께 둘러볼 수 있게 하면 좋으련만.

제2땅굴, 월정리역 등을 둘러보려면 고석정 입구의 철의삼각지전적관에서 출입허가서를 작성해야 한다.
제출했던 신분증을 받아들고 백마고지 위령비가 서있는 언덕에서 백마고지를 바라본 후, 되돌아나와 보수공사 중인 철원 노동당사 들렀다가 도피안사(到彼岸寺)로 향한다. 이곳 역시 한때는 군인의 검문을 받아야만 출입이 가능했지만 이젠 후방의 여느 절집처럼 그냥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하다. 그 사이 삭막하기만 하던 절집 분위기도 많이 누그러져 호젓한 산사 분위기까지 느껴지니 세월 참 좋아졌다.

월정리역엔 열차의 잔해 일부분이 녹슨 채 남아 있다.

도피안사는 865년(경문왕 5) 도선국사가 철조비로사나불좌상(국보 제63호)을 만들어 철원의 안양사(安養寺)로 옮기던 중 사라진 불상이 있던 자리에 세운 절집이다. 역사 속 수많은 세력이 철원 지역에서 부닥치면서 절집은 여러 차례 화재를 입었으나 이 철불만은 훼손되지 않고 남아있으니 거의 기적이라 할 수 있다.


남한과 북한을 가로막고 있는 휴전선은 국경이 아니다. 우리 한반도는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서 통일을 꿈꾸는 땅이다. 그 대표가 바로 철원이다. 휴전선 155마일 중 무려 28%인 43.6마일을 끌어안고 있는 땅, 그래서 더욱 더 통일을 열망하게 되는 땅 철원.


이 철원 여행은 언제나 미완이었다. 이번 여정도 마찬가지다. 래프팅 고무보트가 한탄강을 가득 메우고, 민통선 안에 있어 통제되던 몇몇 곳이 풀리긴 했어도 여전히 철원 여행은 미완이다. 마치 못 이룬 궁예의 꿈처럼.
1,100여 년 전 삼한통일을 꿈꾸던 궁예도, 왕건도 모두 경배했을 철불에 삼배를 올리고 나서는 길. 이 미완의 철원 이야기가 빠른 시일 안에 완성될 수 있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 글·사진 민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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