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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철원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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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08.30 09:13 / 수정 : 2007.08.30 09:13

철원의 대표적인 절집인 도피안사. 예전엔 출입이 까다로웠으나 요즘엔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다.

“일목대왕의 호령소리 들어보았는가”
통일조국 대동방국의 수도를 꿈꾸는 땅

고석정에서 2km쯤 상류에 있는 직탕폭포도 한탄강의 명소다. 이 폭포의 높이는 2~3m쯤 되고, 폭은 강 너비와 같은 80m에 이른다. 길손은 맨 처음 직탕폭포를 봤을 때, 일(一) 자처럼 생긴 긴 암벽에서 강물 전체가 쏟아지는 모습을 보곤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철원군청에선 이 폭포를 ‘한국의 나이아가라’라고 홍보하고 있는데, 직탕폭포를 본 사람들 중 십중팔구는 ‘한국의 나이아가라’라는 대목에서 피식 웃는다. 한탄강을 그랜드캐년 같다는 것은 그런대로 봐줄 수 있다는 사람이 많지만, 직탕폭포를 한국의 나이아가라라고 하면 이는 좀 과장이 심하지 않냐고 생각하는 것이다.

도피안사 철조비로사나불좌상.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던 새로운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길손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직탕폭포는 철원을 찾을 때마다 한번쯤 들렀다가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이곳 주민들은 여름이 되면 폭포수 아래에서 낚싯대 드리우고 팔팔 살아 숨 쉬는 물고기를 낚고, 폭포수 위쪽에선 다슬기를 잡는다. 그리고 쏟아지는 폭포수 소리를 들으며 맛보는 매운탕 때문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많다. 아마 이런 여러 정경이 좋아서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연기 잘하고 예쁜 미국의 여배우 조디 포스터는 조디 포스터대로, 곰살궂은 산골의 갑순이는 갑순이대로 다 매력이 있는 법이다. 평범한 산골 아낙인 갑순이에게 ‘한국의 조디포스터’라 하면 그건 어쩌면 욕이 될지도 모른다. 그냥 그녀는 늘 가까이에 있는 우리의 사랑스런 연인이기 때문이다.


이제 민통선 비무장 지대로 들어가 보자. 고석정 입구에 있는 전적지 관리사무소에서 전적지견학 신청서를 작성해 제출하고 선도 차량을 따라 나선다. 가로질러 가는 철원평야는 진짜 너르다. 철원평야 일대는 현무암임에도 점토질이라 물이 잘 빠지지 않으니 논농사가 가능하다. 거기에 휴전선과 가까워 오염원이 전혀 없는 청정지역인데다 등숙(登熟) 기간의 일교차가 평균 8~11˚C로 벼농사 짓기에 이상적인 기온이라 한다. 철원 사람들이 전국 제일이라 자랑하는 ‘철원 오대쌀’이 여기서 생산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생산량은 강원도 총 생산량의 1/5이라니 철원은 정말 복 받은 땅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상념도 잠시, 평야를 둘러싸고 있는 나지막한 산에는 모두 초소가 있다는 사실에서 휴전선이 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요즘의 화해 분위기를 반영하듯 대남방송은 들리지 않는다. 한때 시도 때도 없이 울려 퍼지는 대남방송에 외지인은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데 소음이 사라지니 평화로워 보이는 평범한 들판일 뿐이다. 철책과 총부리는 언제쯤 거두게 될까.


철의 삼각 전망대에선 북녘 땅을 바라보는 시간이 짧다. 안내인의 지휘봉 끝으로 백마고지, 피의 능선, 그리고 고남산으로 불리는 김일성고지, 낙타고지가 차례로 걸려든다. 그리고 바로 앞쪽 가까이에 있는 들판은, 울창한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 옛날 궁예(弓裔·?-918)가 세웠던 태봉국 도성(궁예도성)이 있던 자리라 한다.

명성산 북쪽 기슭에 있는 삼부연폭포. 높이 20m에 3단으로 된 폭포로 철원팔경의 하나로 꼽힌다.

1,100여 년 전 후삼국 중 후고구려의 맹주로서 삼한을 호령했던 일목대왕(一目大王) 궁예. 흔히 그는 신라의 몰락한 진골 귀족의 후예로서 신라 제47대 헌안왕이나 제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가 꿈을 펼 무렵 천년왕국 신라는 아주 어지러워 언제 망할지 모를 처지에 있었다.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 유리걸식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민란도 끊이지 않았다. 결국 지방 곳곳에서는 양길, 아자개, 김순식 등의 호족들이 들고 일어섰다.
 
궁예는 처음에는 기훤 아래에 있었으나 기훤의 사람됨이 틀렸다 생각하여 892년 북원(원주)의 양길의 수하가 된다. 그리곤 양길의 지원으로 강원·경기·황해 일대를 공략하여 많은 군사를 모으는 데 성공하자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한반도 중부 지방에서 크게 위력을 떨치게 된다. 궁예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고락을 함께 하며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해 신라에 등을 돌린 백성들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그는 세상이 끝나는 날 현신해 세상을 구원한다는 미륵불이었고, 백성들은 그런 궁예를 자신들을 구원해줄 대상으로 삼았다.


궁예는 해상무역으로 크게 일어선 왕건 집안의 협조로 군사력과 경제력을 얻으면서 896년 철원(구철원)으로 도읍을 옮겨 강성한 나라를 건설한다. 898년 철원에서 송악으로 다시 도읍을 옮기고, 899년 북원의 양길을 비뇌성 전투에서 참패시켰다. 이어 900년엔 광주·충주·청주 등 3개 주와 당성(화성군 남양)·괴양(괴산) 일대를 정벌하고, 901년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왕이 된다. 그리곤 903년 금성(나주)을 점령하면서 위력을 떨친다.


당초 궁예가 현재의 구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긴 이유는 왕건 세력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북원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떨친 양길을 제압하려면 송악 호족들과 제휴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궁예는 뜻을 이루자 905년 다시 철원(구철원 북쪽 30리에 있는 풍천원)으로 복귀했다. 그러면서 청주 지역의 1천 가구를 철원땅으로 이주시킨다. 이것은 궁예가 송악 세력 외에 새로운 지지세력을 확보하려는 뜻이었다. 궁예로서는 왕건을 비롯한 송악 세력만으로는 천하를 경영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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